값이 붙지 않는 유일한 이동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제국이 가져간 것과 끝내 가져가지 못한 것


1. 나는 달리기에 대해 쓰려고 했다

인간의 이동에는 언제나 값이 붙는다.

배표와 기차표, 비행기표. 국경을 넘을 때 필요한 서류와 허락. 우리는 움직이기 위해 늘 무언가를 지불한다.

그런데 값이 붙지 않는 이동이 하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달리기다. 두 다리만 있으면 되고, 아무에게도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

그 생각을 글로 옮기려던 참에 사진 한 장을 받았다. 한때 나와 같은 회사에서 일했던 동료가, 자기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다가 보내준 것이다.

그런데 사진 속 남자는 달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서울 소공동 황궁우 앞에 정장 차림으로 나란히 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농구 국가대표 염은현과 아내의 흑백 사진
황궁우 앞에 선 염은현(1914~1999)과 아내. 유족 제공.

2. 베를린 올림픽 농구 대표, 사진 속 남자

남자는 훤칠한 키에 정장을 입고 아내와 나란히 서 있다. 뒤로는 3층 팔각 지붕이 겹쳐 올라간다.

황궁우다. 서울 중구 소공동, 지금의 웨스틴 조선 서울 호텔 바로 옆에 남아 있는 건물이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환구단의 부속 건물이자, 이 나라가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제국이라 불렀던 자리다.

이름은 염은현. 1914년 2월 서울에서 태어났고, 연희전문을 나왔다. 스물두 살이던 1936년, 그는 베를린 올림픽에 농구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손자가 내게 보내준 것은 이 사진과 손으로 눌러쓴 메모 몇 장이었다. 메모에 적힌 것은 이력이었다. 태어난 해, 가르친 대학의 목록, 세상을 떠난 해, 받은 훈장.

나는 그 너머를 알지 못한다.

그가 코트에서 어떤 선수였는지, 베를린에서 조선 선수들이 누구와 붙어 어떻게 졌는지, 왜 운동을 그만두고 책상 앞에 앉았는지 모른다. 검색해도 나오지 않고, 물어볼 사람은 이제 손자뿐이다.

잊힌다는 건 이런 것이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이력만 남는 것.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 조선 서울 호텔 옆에 남아 있는 대한제국 환구단 부속 건물 황궁우의 3층 팔각 지붕 전경
서울 중구 소공동에 남아 있는 황궁우. 사진 (촬영자명) / CC BY-SA (버전)

3. 값의 목록

1936년 여름, 일곱 명의 조선인 청년이 베를린으로 향했다.

마라톤에 손기정과 남승룡. 농구에 이성구와 장이진과 염은현. 축구에 김용식. 복싱에 이규환.

1911년생 이성구가 맏형이었고 1917년생 장이진이 막내였다. 맏형이 스물다섯, 막내가 열여덟이었다.

그들의 이동은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었다.

서울역에서 기차에 올라 신의주를 지나고, 지금의 중국 단둥과 선양, 하얼빈을 거쳐 만저우리에 닿았다. 거기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갈아타 모스크바까지 8일을 달렸다. 다시 바르샤바를 지나서야 베를린이었다.

그 여정에 붙은 값의 목록은 길다.

기차표가 있어야 했다. 국경마다 서류가 있어야 했다. 출전 자격을 얻으려면 남의 나라 대표팀에 들어가야 했다. 가슴에는 남의 나라 국기를 달아야 했고, 기록부에 올라갈 이름도 남의 나라 발음으로 적혀야 했다.

베를린까지 가는 길은 전부 제국의 것이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비싼 값이었다.

 1936년 조선 선수단이 서울역에서 신의주와 만저우리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모스크바와 바르샤바를 지나 베를린까지 이동한 육로 경로를 표시한 지도
서울을 출발해 만저우리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갈아탄 1936년의 여정.

4. 종이 위의 것과 몸이 겪은 것

1936년 8월 9일, 마라톤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청년은 손기정이었다. 2시간 29분 19초. 넘지 못한다고 여겨지던 2시간 30분의 벽이 그날 깨졌다.

그런데 그 결과가 종이에 적히는 순간, 그것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됐다. 국적란에 일본이 적혔고, 이름도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

여기서 나는 내 생각을 고쳐야 했다.

달리기에도 값은 붙었다. 그것도 가장 비싼 값이었다. 그러나 제국이 가져간 것을 하나씩 세어 보면, 전부 종이 위의 것이었다. 국적, 이름, 기록부의 한 줄, 시상대에 걸린 깃발.

제국이 끝내 가져가지 못한 것도 하나 있었다. 그 42.195킬로미터를 실제로 통과한 몸이다. 다리를 대신 움직여 준 나라는 없었고, 숨이 차오른 것도 그 자신이었다. 그것만은 서류에 적히지 않고, 적히지 않았으므로 빼앗을 방법도 없었다.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은 손에 들려 있던 묘목 화분을 가슴 앞으로 올렸다. 자기가 달아야 했던 표식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그 화분으로 기록부의 국적란이 바뀌지 않는다는 걸 그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했다. 종이 위에서 진 사람이 몸으로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동아일보는 그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 실었다. 8월 27일, 신문은 무기한 정간에 들어갔고 기자들은 붙잡혀 갔다. 종이 위의 것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 대회는 나치가 만든 무대였다. 49개국에서 3,938명이 모였고, 10만 명 규모의 경기장이 새로 지어졌다. 히틀러는 아리아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보여주려 했다. 베를린은 올림픽을 텔레비전으로 중계한 최초의 대회이기도 했다. 그 장비가 실어 나른 것은, 정작 유색인종 청년들이 이기는 장면이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대에 오른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동메달리스트 남승룡, 손기정이 손에 든 묘목 화분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고 있는 보도사진
시상대의 손기정과 남승룡. 손기정은 묘목 화분으로 가슴의 표식을 가렸다.

5. 앞의 이름, 그다음 이름

그날 세 번째로 들어온 청년의 이름은 남승룡이었다.

손기정과 같은 해에 태어났고, 같은 열차를 타고 왔고, 같은 코스를 달렸다. 그의 고향 순천에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딴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그러니 잊힌 이름이라고 말하면 정확하지 않다.

다만 나는, 그 이름을 손기정만큼 자주 불러본 적이 없다.

기억은 지워지는 방식으로만 사라지지 않는다. 덜 부르는 방식으로도 사라진다.

1936년 8월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손기정 사진, 가슴의 일장기가 삭제된 상태로 인쇄된 일장기 말소 사건 당시의 신문 원본
일장기가 지워진 채 인쇄된 지면. 이 한 장으로 신문은 정간됐다. (출처: 동아일보 1936.8.25.)

6. 코트를 떠난 뒤

염은현은 달리지 않았다. 코트에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종이에 남을 기록조차 없었다. 마라톤에는 순위와 시간이 남지만, 그가 뛴 경기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메달도 없었고, 개인의 이름이 남을 자리도 없었다.

그러니 그가 그 여름에 무엇을 겪었는지는 오직 그의 몸만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몸은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선수로 남지 않았다. 해방 이후 그는 학자가 되었다. 서울대와 이화여대, 국학대와 단국대를 거쳐 1957년 성균관대 사학과에 부임했고, 전공은 서양사였다. 생전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내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다.

왜 코트를 떠났는지, 왜 하필 서양사였는지, 스물두 살에 본 베를린이 그 선택과 무슨 상관이 있었는지는 메모에 적혀 있지 않다.

몸이 겪은 것은 빼앗기지 않는다. 다만 말해지지 않으면 그 사람과 함께 없어진다.

물어볼 사람이 아직 한 명 남아 있다는 것이, 이 글을 쓰는 동안 계속 마음에 걸렸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야외 농구 코트. 모래 바닥에  hoop이 설치되고 관중이 돌계단에 앉아 있다.
1936년 베를린. 농구는 테니스장 위 야외 코트에서 열렸다. 개인 기록도, 이름도 남지 않은 그 자리.
출처: Olympics.com, “Olympic basketball’s muddy beginnings”

7. 오늘 아침

여름 아침 햇살이 비치는 트랙 위로 드리운 달리는 사람의 그림자, 값이 붙지 않는 유일한 이동이라는 글귀가 적힌 에세이 카드 이미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아침의 달리기. 기록은 남지 않았고, 그림자만 남았다. (사진: 직접 촬영)

오늘 아침 나는 집 앞을 달렸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아무 서류도 챙기지 않았고, 가슴에 아무것도 달지 않았다. 기록도 남지 않았다. 숨이 차오를 때쯤 90년 전 그 여름이 떠올랐다.

그러니 값이 붙지 않는 유일한 이동이라는 말은, 정확히는 이런 뜻이다.

값을 요구받지 않는 이동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해 그들은 낼 수 있는 것을 전부 냈다. 기차표를 냈고, 서류를 냈고, 이름과 국적을 냈다.

다 내고도 남는 것이 있는 이동이라는 뜻이다. 종이에 적히지 않아서 압수할 수 없고, 대신 해줄 수 없어서 빼앗을 수도 없는 부분. 결승선까지의 42.195킬로미터가 그것이고, 코트 안에서 그가 움직인 거리도 그것이다.

우리가 이름을 아는 사람과 이름을 잊은 사람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같은 열차, 같은 8일의 시베리아. 다만 한 사람은 결승선을 먼저 통과했고, 다른 사람은 코트에 있었고, 우리는 앞의 이름부터 불렀을 뿐이다.

내 휴대전화 속 사진의 남자는 황궁우 앞에 서 있다. 제국이 시작된 자리이자 곧 사라진 자리다.

그의 손자와 나는 같은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셨다.

다음에 만나면, 이번에는 내가 먼저 물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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